또한 일본은 1945년 천왕이 항복한 후 폭력과 강요에 의한 강탈한 모든 것을 침략이전의 상태로 환원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배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중요성을 아는 나라는 분명히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역사 속에는 훌륭한 스승 지혜 문화 예술 정책 대책 등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훌륭한 역사를 나라의 보배로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점점 다른 나라의 역사나 문화 언어 등만 따라하고 모방만 한다면 언제 우리의 훌륭한 역사를 지킬 것이며 문화들이 발전을 할 것인가? 나라의 힘은 그 나라의 역사를 기록 본존 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나라가 힘이 있는 나라라고 본다. 또한 발전을 분명히 가져다줄 것이다. 우리 서로 협력하여 우리의 훌륭한 역사를 찾아서 기록 보존하여 후손에게 떳떳하게 물려주는데 협력 합심해야 된다. 역사를 모르고는 어떠한 힘도 나오지 않고, 우리의 훌륭한 상고사를 먼저 알 때에 대책이 나온다고 본다. 누가 과연 단군조선사 즉 마지막 단제(檀帝=단군왕검)이신 제47대 고열가(古列加) 단제(BC 295년~ BC 238년) 후에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지며 그 후 고주몽의 고구려로 이어지며 그 후 대조영의 대진국 즉 발해로 이어지는 역사를 누가 알고 있는지 누가 가르치고 있는지 누가 가르칠 의무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역사에서부터 시작을 하는지 그것이라도 누가 가르쳐 주길 바란다. ■ 독도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리에 속하며, 동경 131˚52´ ~ 131˚53´ 북위 37˚14´00˝ ~ 37˚14´45˝에 위치한다. * 울진군 죽변에서 동쪽으로 215km 울릉도에서 92km이다. 일본 시마네현 사카이미나도에서 220km 일본령 도서로써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의 오키섬에서 160km로써 울릉도보다 훨씬 멀다. ◐ 독도의 옛 명칭은 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라고 불렀으며, 1881년(고종18년)부터 독도(獨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일본에서는 다케시마 마쓰시마 라고 불렀고, 프랑스에서는 리앙쿠르(Liancourt)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이라 하고 있다. 한국산악회에 의하면 동도는 면적 64,800㎡ 최고 높이는 99.4m 서도는 면적 95,400㎡ 최고 높이는 174m며 그 주위에는 가제바위 구멍바위 지네바위등 36개의 암도(巖島)와 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 독도의 옛 이름은 우산도(于山島)며 혹은 자산도(子山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모도(母島)인 울릉도의 자도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 울릉도(鬱陵島)의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귀복(歸服)한 것은 512년 신라(新羅) (지증왕 13년) 하슬라주 군주 이찬 이사부의 정벌이 있는 후부터다. 그런데 우산국이란 호칭은 고려 현종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쓰지 않고 있었다. . 고려사에서 울릉도를 지리지(地理志) 동계 울진현조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 1141년 고려인종 19년에는 명주도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이 관원을 파견하였다. . 1425년 조선 세종 7년에 피역민을 쇄환하기 위하여 전 판장기현사 김인우를 울릉도로 파견할 때 그 직함을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安撫使)라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반영하고 있다. . 1432년에 편찬한 이 지리지의 강원도 울진현조에서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正東) 해중에 있다라고 했다. . 1531년 중종 26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우산도와 울릉도가 정동해중에 있다라고 했다. . 1693년 숙종 19년에 안용복이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하다가 일본 어민들에 피랍되자 이에 일본에 동래출신 어부 안용복이 항의를 대마도주에 하자 그해에 조선어민이 일본령 다케시마에서 고기잡이 하는 것을 금지하여 달라는 요지의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왔다. . 1696년 일본 막부는 죽도(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여 어민들을 도해금지령을 내렸다 . 1714년 숙종 40년 강원도 어사 조석명의 보고에 울릉의 동쪽으로 도서가 잇따라있고 이 섬들은 왜경과 접하게 된다 . 1883년 4월 고종 20년에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입거(入居)시킴 . 1898년 광무2년 5월에 지방관제를 개칭하여 울릉도에 도감을 두도록 함, 이는 일본인들이 잠입하여 수목을 벌채하고 주민들과의 분규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였다. 그 당시 울릉도의 호구는 400여호 1,700명 정도 경지는 7,700여마지기에 달하였다. . 일본이 독도(석도)를 다케시마로 명명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써 그 영토를 편입한 것은 1905년 2월이었다 그것은 러일전쟁중 특히 일본의 국운을 걸었다고 하는 러시아함대와의 일본해전을 얼마 앞두고 있었으므로 대러전쟁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고시 절차가 비밀스러웠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 한국 즉 우리나라가 독도의 일본영토로 편입을 알게 된 것은 1906년 4월초였다. 독도를 탐사하고 울릉군청을 방문한 시마네현 사무관 등이 울릉군수 심흥택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에 한국의 참정대신 박제순은 이해 1906년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하여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 침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 결국 독도문제가 우리나라와 일본간의 영토분쟁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905년 시마네현의 고시에 의한 독도의 비밀스런운 편입조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울릉도가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이속되었다가 경상북도로 이속된 것은 1914년부터다 . 1948년 6월 미국공군의 폭격연습 중 때마침 독도에서 출어 중이던 어민 30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년 2월 27일자로 독도룰 미공군 연습 |